1. 늦바람 불다.
몇년동안 비행기 기내식을 먹어본 적이 없는고로, 아니, 사실은 태어나서 한번도 먹어본 적 없다. 혹자는 내가 해외여행을 몇번 나갔다 온 사람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을테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거짓을 말했던 적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한번도 해외여행을 나가본 적은 없다. 기껏해야 작년 연말에 2박3일 제주도 여행을 간게 전부이다.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 왜 못갔었냐고 물어보면 답은 뻔하다. 돈이 없었거나, 시간이 없었거나. 젊고 어릴(?)땐 시간이 남아도 돈이 없었고, 나이가 들어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돈이 준비되면 시간이 없어졌다. 이런 걸 해외여행 딜레마라고 하던가.. 흠. --a 어쨌든 내 사주나 손금에도 해외 나갈 운이 이제까지는 없었다고 한다. 그럼 앞으로는?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 사주대운이 미래에 대해서는 잘 못맞추더라. 누구나 그렇듯이..
근 3년 동안 여름휴가 한번 못써보고 회사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다보니 남은 건 뱃살이요. 느는 건 스트레스. 일은 점점 많아지고 집중도 안되던게 이제 그 한계에 다달았나 보더라. 자꾸 딴생각만 품게되고 이직을 해볼까. 몇달 쉬어볼까.. 다 때려치고 어학연수나 다녀올까...
도저히 이런 정신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생각을 한게 두어달 전이었고, 무얼 해야 리프레쉬를 확실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한지 한달쯤... 그동안 퍼지게 술도 마셔보고 카메라 렌즈도 구입해 보았고 PDA도 하나 사서 갖고 놀아봤지만 효과는 며칠 못갔다. 덕분에 카드값은 꾸역꾸역 늘어났고 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졌지만 리프레쉬효과는 미미했다. (그돈 다 어디쓴겨 ㅠㅠ)
회사에서 직원들과 점심을 먹다가 우연히 나온 해외여행이야기.. 그땐 회사에서 해외출장 좀 보내달라는 그런 불만성 질문으로 자연스레 분위기 조성된거였지만,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회사돈은 커녕 내돈으로도 여행 못가본 난 별로 할 이야기가 없더라. 서른 두해, 참 힘들고 빡세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도 이만큼 나이 먹을 때까지 외국물 한번 안먹어봤다는 사실에, 왜 그렇게 아둥바둥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 쳤었던가... 그래서 남은게 만족스럽냐. 하고 반문하게 되더라.
그래, 이번 기회에 그냥 확 떠나버리는거야. 경비? 카드가 있잖아! 11개월할부! 언제갈까? 길게 끌면 내 성격에 들뜨기만 할테고 얼른 결정해서 가버리는게 나을 것 같아 점심먹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몇군데 여행사이트를 물색해 보았다.
입문용 코스부터 럭셔리 디럭스패키지까지 수많은 상품들이 어서 질러보라고 날 꼬시는데 도무지 어디가 좋고 어디가 싼지 알게 뭐람.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그래도 주변에 갔다와 본 몇몇 직원들에게 '야 어디 좋냐?' 하고 물어본 결과 몇군데로 줄어들긴 했다. 그날 울 직원들 다 알 듯하다. 내가 오후동안 일 하나도 안하고 여행스케줄 고민했다는 사실을.. ㅡ.ㅡ
처음엔 별 생각없이 며칠 푹 쉬다올 곳을 물색해 보았다. 리프레쉬가 목적이었으니.. 20만9천원짜리 대만 1박 2일 에어팩을 시작으로 40만원대 홍콩팩 등 비교적 저렴한 값에 다녀올 수 있는 그런 상품들이 꽤 있었다. 흐음... 이것도 쓸만하고 저것도 쓸만하군... 맘만 먹으면 쉽게 갔다올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었네. 왜 이제서야 이런걸 보았나...하며 여기저기 이잡듯이 사이트를 뒤적거리다보니 슬슬 호기심은 증폭되고 눈은 점점 높아져만 간다. 간 큰 놈.. -_-;; 니 카드가 그리 한도가 높드냐!
결국 최종적으로 낙점된 목적지는 바로 시/드/니/였고, 그 때부터 난 시드니에 필이 꽃혀서 엠에센 대화명도 Oh! Sydney!로 바꿔놓고 방방 곡곡 여름휴가를 시드니로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게 되는데.. 막상 이래놓고 막판에 못가게 되면 무슨 낯으로 얼굴 들고 다니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