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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저기 길 좀 가르쳐주실 수 있으세요?” “아, 저기 저희도 여행 온 거라… 근데 한번 보죠. 어디를 찾으시나요?”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이들은 독일에서 여행을 왔다고 하는데, 갑자기 배낭에서 창문만한 지도를 꺼내어 들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내가 원한 건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꽤 미안하다.
서큘러키에 도착하고서 록스 지역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하버브릿지를 한번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선 지도를 들고 따라왔는데, 지도엔 하버브릿지로 향하는 진입로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열심히 록스의 밤길을 헤메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반가운 마음에 이들에게 달려왔지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먼저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해봐.” “음, 아마도 여기쯤 있는 거 같아. 아까 우리가 이 호텔에서부터 걸어왔잖아.” 둘은 엉뚱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길을 찾고 있다. 이들을 말려줘야 할까, 아니면 계속 지켜봐야 할까 껌뻑껌뻑 난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본다. 그러기를 몇 분,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우리에게 소리를 친다. “길 잃었어요?” “아, 네 조금요.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현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여자 둘이 웃으면서 우리 무리로 다가온다. 살짝 바람에 풍기는 향수냄새에 고개를 들어봤더니 꽤 미인이다. (^^) “하버브릿지 위를 걸어보려 하는데 진입로를 못찾겠어요.” “아, 하버브릿지~ 제가 잘 알아요. 자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볼까요?” 역시나,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탐독중인 그녀. “음, 아마 우리가 여기쯤 있는 거 같아요. 지도상에는 하버브릿지로 올라가는 진입로가 표시가 안되어 있어서 조금 어렵네요.” “우리가 여기 있는 게 맞다면 저기 아래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될꺼에요. 혹시 샹그릴 라 호텔이라고 아세요? 거기 옆에 진입로가 있을꺼에요.” “아니야, 반대쪽으로 가야 해. 저쪽 길로 가면 바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옆에서 다른 여자분이 거든다. “어머, 거짓말 하지마~. 얘는 여기 안 살아서 몰라요. 제 말만 믿으세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제 말이 법이에요~!” 무척이나, 분위기가 시트콤스럽긴 한데, 나쁘진 않았다. 적어도 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여행객들을 위해서 본인들의 시간을 충분히 소비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걸. “오케이, 정말 고마워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좋은 여행 되길 바랄께요.” ‘그래요. 고마웠어요~. 저기 독일 친구들도 고마웠고요. 여행 잘하세요~” “네, 굿바이~ 좋은 하루.” 꽤 즐거운 해프닝이었다. 원하는 답을 충분히 얻지는 못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충 저기쯤 가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일단 아까 들은 샹그릴 라 호텔까지 내려오니 길이 두 갈래이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가라고 일러준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엔 전혀 반대쪽으로 가는 듯 하다. 다시 지도를 펼쳐 들고 열심히 탐독을 하고선 방향을 왼쪽으로 틀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10여분 쯤 후에 진입로가 드디어 나타났다. 씨익~ 하고 입가에 웃음이 난다. 좋은 추억 하나가 추가된 느낌이다.
서큘러키나 시드니 중심가는 밤에도 사람들로 넘쳐나지만 이곳은 그나마 인적이 드물다. 록스에서 여기까지 올라오기까지 아까의 그 일행 외에는 그다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본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진입로 계단을 올라와보고 나니 역시 이곳도 관광지인지라 산책하는 사람이 꽤 많다. 안전봉을 들고 배회하는 경찰들과 운동화를 신고 열심히 뛰어가는 사람들, 손을 꼭 잡고 걸어 다니는 연인들까지… 생각보다 하버브릿지의 진동은 상당했다. 자동차도로와 산책로와의 구분이 명확해서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이정도 진동이라면 삼각대로 멋진 사진을 찍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다리 난간으로 고개를 돌리니 야경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 그 위로 하얀 보름달이 꼭 조명등 같다. 왜 시드니가 세계 3대 미항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밤의 하버브릿지 위헤서 꼭 오페라하우스를 감상해 보길 바란다. 반짝거리는 가로등과 자동차들, 항만을 가로지르는 페리들의 불빛이 너무나 낭만적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 모습에 연신 ‘판타스틱’을 외친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선 난간에 기대어 셔터를 계속 누르기 바쁘다. 아, 이 멋진 풍경을 꼭 예쁘게 담아봐야지 하는 욕심에 그 흔들리는 다리 난간에서 앵글을 잡느라 분주하다. 그런 내 모습이 신기한 듯, 연신 사람들이 지나가며 날 쳐다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하버브릿지 위에 있었던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아홉 시가 다 되어간다. 하버브릿지 끝까지 한번 걸어볼까 생각하고 올라온 것인데, 이제 겨우 반밖에 못지나온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록스로 내려온다. 몇 장의 야경 사진을 더 찍고서는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속에서 아까 찍은 사진을 리뷰하느라 바쁘다. 과연 얼마나 예쁘게 나왔을까, 은근히 기대가 된다. 숙소에 들어와서 짐 정리를 간단히 하고 리셉션으로 내려왔다. Wake Up! 의 리셉션은 가운데 티비가 있고, 티비를 중심으로 소파가 ㄷ 자로 위치하며, 티비 뒤로는 십여 대의 인터넷이 되는 PC들이 설치되어 있다. 꽤 늦은 시간임에도 몇몇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느라 정신 없고, 몇몇은 소파에 길게 뻗어 누워 테니스를 보고 있다. 벌써 아래층 펍에서 댄스곡들이 쿵쿵 울려댄다. 꽤 익숙한 멜로디인 듯해서 귀를 쫑긋 세워보니 Atomic Kitten의 Don’t you know다. “일찍 오셨네요.” “아, 방금 내려왔어요. 하버브릿지에 갔다 왔거든요.” “넹.” 낮에 봤던 윤정이 까만 블라우스를 입고 내려왔다. 흠, 레이스가 여기저기 달린걸 보니 나름대로 무대 의상인 듯 하다. 잠시 후 로버트도 도착한다. 일단 소파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로버트, 피곤하지 않아?” “음, 조금 피곤한 거 같긴 해.” 뭔가 재밌는 대화가 필요해.. “윤정씨, 그거 왜 피곤한지 내가 알려줄까요?” “어, 뭔데요?” “낮에 바닷가 갔다 왔잖아요. 바닷바람에 소금기 때문에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 삼투압 때문에 몸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가요. 그래서 피곤한 거에요.” “와, 정말이에요? 말은 되는 거 같은데…” “그..글쎄요. 근거는 희박하죠. 뭐 제 나름대로 이론을 만들어 본거에요. ㅋㅋ” “무슨 말을 하는지 나한테도 좀 가르쳐 줘요.” 로버트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이걸 다 영어로 다시 설명해줘야 할텐데, 삼투압이 영어로 뭐였더라…음… 꽤 썰렁한 대화를 몇 번 더 나눈 후에, 펍으로 내려갔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아직 본격적인 펍타임이 시작되지 않았는지, 실내에는 당구치는 사람들 몇과 얼마 안되는 테이블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 중인 사람들 정도이다. 호주 맥주인 빅토리안 비터 하나를 사 들고선 탁자에 앉아서 한 모금 넘겨본다. 쌉싸름한 느낌이 꽤 시원하다. DJ의 손놀림이 빨라졌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스테이지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 손에 여전히 맥주병을 들고서는 흐느적 흐느적 흔들어대는 모습이다. 홍대 클럽에 가보면 알겠지만 대부분 이정도 수준에서 몸만 흔들거리는게 얘네들의 춤문화이다. 외국 애들이 춤을 못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모습을 보니 상상 이상이다. 80년대에 유행했을 법한 브레이크 댄스를 조금 구사한다면 아마 이 스테이지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몸치였던 나도 그들과 어울려 흔들흔들 리듬에 몸을 맡기기 여념없다. 윤정은 그간 갈고 닦은 실력 때문인지, 탁월한 춤솜씨를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나 역시 필을 받았는지 평소에 안하던 동작까지 구사하면서 뻘뻘 땀을 흘리고 있다. DJ는 세시간을 넘게 강한 비트의 팝송을 흘려 보내주고 잇다. 슬슬 술에 취해, 춤에 취해 사람들이 하나 둘 광란의 터널 속으로 빠져든다. 아차 그런데, 내가 30대라는 걸 잊고 있었나보다. 슬슬 몸 여기저기에서 삐거덕 삐거덕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이봐, 몸주인. 넌 30대야, 무리하지마.’ “윤정씨, 헉헉. 아무래도 전 이제 올라가서 자야할 것 같아요. 허리가 아퍼요. 흑” “에구, 그래요. 잘 들어가구요. 좋은 꿈 꾸세요.” “네, 로버트도 안녕~” 땀에 흠뻑 절은 채, 조심스레 방으로 올라왔다. 아까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벌써 불은 꺼져 있고 다들 자기 침대로 들어가 자고 있다. 샤워를 할 기운도 없어, 그대로 몸울 매트리스에 눕혔다. 5일째 밤, 시드니의 첫날밤이 이렇게 땀 범벅 속에 흘러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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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15 노쓰헤드로부터 얻은 푸르름.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14 내가왔다! 시드니.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13 맥켄지에서 얻은 평화, 그리고 새로 만든 인연과 작별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12 경비행기는 공짜가 아니었다 -_-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11 프레이저섬 일출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10. 패트릭, 노니, 파스칼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9 프레이저섬 탐험하기.
- 2007/01/02 2004 호주배낭여행 - 8 허비베이에서의 첫날밤

◀ 노쓰헤드에서 내려오던 중-
노쓰 헤드에서 내려오는 길은 생각보다 평탄했다. 이것도 산행이라고, 우리 셋의 표정은 꽤 지쳐 보이는 듯 했고, 돌아오는 길은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어느새 오후 3시, 점심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기에, 코르소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케밥집이 맛있대요. 저도 들은 거지만…”
“그래요? 그럼 한번 먹어봐야지.”
한국에서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맨리 코르소 거리에 케밥집이 두 군데 있는데, 둘 다 아주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단, 양고기의 특유의 향이 싫은 사람은 비프 케밥이나 치킨 케밥을 주문하라는 조언까지 있었으니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치기가 아깝지 않을까. 비프 케밥과 감자칩, 바닐라 콜라로 구성된 세트메뉴를 하나 사고서는 벤치에 앉았다.
사실 태어나서 케밥을 처음 먹어보는 거라 이게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양은 성인남자가 먹을 만큼 충분했고 나름대로 한끼 식사용으로는 괜찮은 듯 싶다.
“아, 잘 먹었다.”
치킨 케밥 하나를 다 먹은 윤정이 내 제안에 보답한다. 다행이다. 추천해 준 메뉴가 맛이 별로이면 꽤 민망했을 테니…
맨리에서 다시 서큘러키로 들어가는 페리는 30분 마다 하나씩 있다. 방금 배가 떠났는지, 사람들은 별로 없다. 담배 한대를 피워 물면서 시드니의 첫날밤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해 본다.
“오늘 밤에 펍에 가서 한잔하지 않을래요? 맨날 혼자 가니까 심심하던데…”
윤정의 뜬금 없는 제안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 춤 못추는데…
“아, 우리 백패커스 지하에 있는 거기 말이에요??”
“네, 어때요?”
“음, 그래요. 한번 가보죠 뭐.”
“로버트, 같이 가. 내가 출입증을 빌려줄께. 난 이제 얼굴을 아니까 그냥 들어가도 괜찮아.”

맨리 비치의 모습
대부분 나라가 그러하듯이, 음주 문화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보다 상당히 엄격하다. 호주와 다른 많은 나라에서는 술도 허가 받은 가게(보틀샵)에서만 팔며,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술을 마신다던가, 만취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벌금 내지는 바로 체포 당하기도 한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 수도 없거니와 미성년자가 펍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다. 호주도 물론 예외가 아닌데, 만 20세 미만의 청소년은 절대 어떠한 경우에도 입장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당연히 편법이 있다.
우리가 묵는 숙소인 Wake Up! 에서는 미성년자를 받지 않는다. 즉 Wake Up!의 출입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식으로 이곳에 숙박을 하는 투숙객이자 성인임을 간접적으로 인증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건물 지하인 이 펍에서는 Wake Up! 의 출입증 소지 여부 만으로 이 사람이 성인인지 아닌지 간편하게 구분을 해낸다. 생각보다 단순한 판단방법인데, 적어도 그 펍에서는 출입증만 있으면 일단 무조건 성인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로버트는 이제 겨우 17세인 관계로 이런 편법을 쓰지 않으면 절대 펍에 입장할 수 없다. 혹시나 얼굴을 보고 들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듣자 하니 같은 서양인들끼리도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얼굴이 있다고 하며, 로버트의 얼굴이 바로 그런 얼굴이라고 한다. 하긴, 저 얼굴만으로 어떻게 17세의 풋풋한 소년임을 떠올릴 수 있을까. ? 행여 로버트가 이 글을 읽으러 오지는 않겠기에 이런 말을 쓰긴 하지만, 사실 로버트의 얼굴 정도면 웬만한 모델 뺨치는 수준급이라는 걸 밝힌다. 샤프한 눈매에 오똑한 코가 남자가 보기에도 무척 잘 생겼다! 절대 로버트의 외모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니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오해 없길 바랄 뿐이다.
“로버트, 혹시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에… 윤정에게 배우긴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안녕하세요’는 굿 모닝 이라는 뜻이에요. 한번 해봐요.”
“아, 그거 알아요. ‘안냐세효!’”
“’안냐세효!’가 아니고 ‘안녕하세요!’”
“안뇨하…세이요!”
“하핫.”
역시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건 힘든가 보다. 발음법이 무척이나 다르니…
“어려워요. 대신에 일본어는 알아요. ‘오…오…오하…’”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유 갓 잇! 맞아요.”
“곤니찌와, 곰방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에 또 뭐가 있을까.”
신났다. 몇 개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를 알려주느라 침이 튀긴다.
“한국말은 정말 발음하기 힘들더라고요. 윤정에게 몇 개 배웠었는데 하나도 못 외우겠어요. 일본말은 조금 쉬운 거 같고…”
“윤정씨는 일본어 할 줄 아세요?”
“네, 일문과 나왔거든요. 흣.”
“헉!”
…
…
…
…

페리에서 바라본 맨리항구의 전경

서큘러키로 돌아가는길 - 로버트와 윤정

갑판에서 구경중인 사람들 - 실제로는 이 두배정도 되는 사람들이 갑판에 빽빽하다.

석양에 노랗게 물든 오페라 하우스 - 맨리에서 돌아오던 중.
서큘러키로 돌아가는 페리가 관광객 만선이다.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갑판에 수많은 사람들은 지나가는 시드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정성스럽게 담느라 정신 없다. 윤정과 로버트는 지쳤는지 의자에 앉아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느새 내가 여행을 떠난 지 5일, 호주에 도착한지 4일이나 되었다. 이제 슬슬 내 여행의 중반기에 돌입한다. 길지 않은 이곳 시드니에서 머무는 시간 동안 욕심내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충분히 느끼고 가도록 하자. 모든 걸 다 보고 나면 다시 오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니…
윤정과 로버트는 버스를 탈 생각이 없나보다. 난 맨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연신 시드니 중심부의 고층빌딩들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한참 걷다가 뒤돌아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나를 보며 웃는다. 괜히 멋적어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가도 그때 뿐이다. 어느새 난 한참 뒤에 쳐져서 사방 팔방의 빌딩들 모습을 찍느라 바쁘다.
시드니 도심의 고층건물들 - 이름은 모름 -

오스트렐리아 스퀘어 타워 - 1층 로비의 모습
로버트는 타운홀 부근의 백팩커스에 묵는 관계로 우리와 일찍 헤어졌다. 윤정도 PC방에 들르기 위해 잠시 후 나와 인사를 하고난 후 종종걸음을 치며 멀어져 간다.
“이따 9시 반에 리셉션 앞에서 봐요~”
“그래요. 이따 봐요~”
잠시 동안 다시 혼자이다. 허나 해가 점점 기울어가는 시드니의 도시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어색하지 않고, 이방인이라는 두려움도 점점 희석되어 간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걸으며 시드니의 도심 풍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시드니 도심 건물의 시계탑 - 오른쪽이 타운홀 시계탑
아직 약속시간이 되려면 꽤 많이 남았다. 원래 맨리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무르지는 않으려고 했는데 본의 아니게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이 남은 자투리 시간 동안 무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서큘러키의 밤 풍경을 보러 가보기로 한다. 숙소에서 배터리 충전을 다시 한 후, 겉옷을 걸치고 힘차게 걸어 나왔다.
"저기 혹시, 길좀 가르쳐 주실 수 있으세요?"
이럴수가! 웬 여행객이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아, 죄송해요. 저도 여행객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오,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좋은 여행 되세요~"
이거 참 별일이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내 모습이 이제 여행자스럽지 않은걸까... 그래, 괜히 어리버리한 여행자 모습 보다는 이런 자신 있는 모습이 더 낫지 않을까? 제법 자신감이 붙는다. 걸음걸이도 무척 현지인스럽다. 처음으로 버스 번호를 물어보지도 않고 대뜸 탄다.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도 자연스럽다. 점점 시드니 시민이 되어가는 듯 한 착각이 든다.
.....나의 적응력이여.

시드니 버스 내부의 모습과 시드니의 밤거리 - YHA Central cross road.
지도와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정오를 향해 가는 시드니의 거리 풍경은 이전 브리즈번이나 허비베이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무척 활기차다. 생수를 하나 사 들고는 오늘의 목적지를 지도를 펼쳐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고민하던 중 만난 시드니의 전차.

마켓시티 옆에 위치한 차이나 타운. 어느 도시에서든 차이나타운은 꼭 있게 마련이다.
오페라하우스를 오늘 가면 남은 날들이 너무 아쉬울 것 같아 다른 곳을 물색해 보는데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어디를 들를까 고민 끝에 일단 서큘러 키로 나가보기로 한다. 도착해서 제일 빨리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는 시드니 항구의 아름다움을 바다 위에서 느껴보도록 하자.

서큘러키. 넘쳐나는 관광객들과 예술가들로 뒤섞인 에너지가 넘쳐난다.
낙첨된 곳은 바로 맨리. 서큘러 키에서 40분 정도 배를 타고 들어가는 곳인데 그리 복잡하지 않은 시드니의 해변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쌉사름한 바다냄새를 맡으며 선착장 주변을 어슬렁거려 본다. 한 손에는 카메라, 한 손에는 지도를 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니는 수많은 여행객들, 그들을 위해, 또는 그들 덕분에 살아가는 예술가 내지는 광대들, 그런 그들의 퍼포먼스와 연주에 박수치며 웃어주는 사람들의 모습에 알맞게 섞여 시끄럽게 흘러가는 서큘러키의 모습에 바로 이게 호주의 열정적인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여기 이 시간 이곳에 나와 같이 있는 이 사람들을 언제 내가 또 다시 만날 수 있겠나. 단지 그들과 한 곳에서 이런 즐거운 모습들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행운이며 행복이리라.


막 출발하는 페리에서 바라본 서큘러 키의 전경.
아마 맨리로 가는 페리를 탄 사람들은 대부분이 관광객들일 것이다.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갑판 위에 서서 저마다 지나가는 멋진 풍경들을 추억하기 위해 셔터를 눌러 대는데, 여간해서 좋은 자리가 아니면 좋은 사진을 찍어내기 힘들 듯 해서 일찌감치 포인트 한 군데를 찍어놓고 움직이지 않고 계속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맨리행 페리에서 바라본 오페라 하우스 - 감동 그 자체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오페라하우스. 지체할 시간도 없이 손은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고, 가슴으론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의 모습을 새기느라 정신이 없다.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

시드니 항만을 여유롭게 배회하고 있는 요트들.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어디를 배경으로 찍을까요?”
“오페라하우스를 왼쪽 뒷 배경으로 해서 찍어주세요.”
“그러죠. 자 하나, 둘, 셋”
무척 샤프하게 생긴 외국인이 나에게 부탁을 한다. 옆에는 자그마한 동양 여자분이 같이 서 있었는데 목에 걸고 있는 걸 보니 Wake Up! 출입증이 아닌가. 은근히 반갑다. 이따 한번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감사합니다.”
“뭘 이정도 가지고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네, 스위스에요.”
“아, 아름다운 나라죠. 옆에 분은 어디세요?”
“한국이에요.”
이런! 한국인이다. 긴가 민가 했더니, 역시 비슷한 동양인이라고 해도 한국인 같아 보였었는데…
“하핫, 그렇군요. 저도 한국인이에요.”
“오 그래요?”
“네, 여기 휴가 내고 배낭여행 왔어요. 오늘이 시드니 첫날이에요. 목에 걸고 있는게 Wake Up! 출입증이네요. 저도 거기 묵고 있는데…”
“와, 정말요?? 이런 우연이…”
반색하며 스위스 남자에게 열심히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 귀엽다. 그녀의 이름은 윤정, 호주에 어학연수 차 들어와서 10개월 정도 머무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옆의 스위스 남자는 로버트라고 하는데, 같은 학교에서 영어공부를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로버트의 나이는 17세. 우리로 따지면 시퍼런 고등학생이다. 아무리 적게 봐도 20대 초반 정도일 듯 했는데, 역시 외국인들 나이는 정말 가늠하기 힘들다.
“괜찮다면 맨리에서 같이 다녀도 될까요?”
“물론이죠.”
혼자 심심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 아무래도 이렇게 묻어 돌아다니면 조금은 더 나을 듯 해서 소위 ‘꼽사리’를 부탁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 아까 사진 찍을 때 껴안는 모습이 왠지 연인 같아 보이는데 괜히 부탁해서 보릿자루 되는 건 아닐까 조금은 걱정스럽다.

맨리 - 해변으로 가는 CORSO 거리.
맨리에 도착한 후 여행자 센터에서 지도와 팜플렛을 몇 장 챙기고선 무리 속에 휩싸여 해변으로 나가는 Corso거리를 걷기 시작한다. 여기도 골드코스트와 크게 다른 느낌은 들지 않는다. 즉 다시 말하면, 해운대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주변에 걸어다니고 도로 양쪽으로 오밀조밀 모여있는 각종 기념품 가게들과 음식점들, 그리고 곧 이어지는 해안도로 바깥으로 보이는 백사장. 은근히 기대를 하고 왔지만 무언가 새로운 느낌이 와 닿지는 않아 조금은 실망스럽다. 뭐,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해운대가 국제적인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곳이 된다는 반증이 아닐까. 단지 너무나 가까이 있고, 너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기에 그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던 것이겠지.

맨리 비치 - 한가롭게 해변을 걷는 사람들
비치를 따라서 걷기 시작한다. 바닷바람에 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백사장에는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한 켠에서는 서핑을 배우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쫄쫄이 부대들로 가득하다.
살짝, 윤정과 로버트의 두어 발자욱 뒤에서 걸어간다. 아무래도 점점 보릿자루가 되어가는 기분이지만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따로 행동하기도 참 애매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고는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긴다.

맨리 해안 끝의 암초무더기 부근에서 - 로버트와 윤정 (너무 다정한거 아냐??)
해안 끄트머리까지 다다르니 암초들로 가득하다. 로버트와 나야 남자이기 때문에 그다지 힘들진 않지만 윤정이 넘어다니는데 조금씩 곤란한가보다. 쉬엄쉬엄 그녀가 뒤쳐지지 않게 기다리면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몸으로 느껴 본다. 언덕배기로 보이는 빌라들이 무척이나 고급스러워보인다. 아마 이곳도 시드니에서 부유하기로 소문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맨리 해안이 바로보이는 언덕배기의 고급 빌라들.
암초 끝으로 자그마한 동산이 보이고 바람이 꽤 거칠어진다. 시드니의 북쪽 끝지점인 North Head라는 곳으로 가는 길목인데, 눈으로 보기에도 꽤 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이미 윤정과 로버트는 헤드까지 올라가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다.

노쓰헤드 - 수평선 너머는 태즈매니아해와 남태평양이다.

좌측- 노쓰헤드에서 바라본 맨리비치 , 우측 - 노쓰헤드 바위 너머 보이는 수평선
20여분쯤 헐떡이며 올라갔을까. 커다란 바위너머 수평선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저 수평선 끝이 남태평양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갑자기 뚫리는 듯한 기분이다. 강한 바람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지만 모처럼 시원한 풍경이다. 아무 말 없이, 정성스럽게 앵글을 잡고서는 사진을 몇장 찍고 정오를 넘어가고 있는 햇살에 몸을 맡겨본다. 시원하고, 편안한 이 느낌. 기억에 꼭꼭 새겨놓고 한국으로 옮겨가야겠다. 감고 있는 두 눈꺼풀 사이로 문득 그 동안 잃어버렸던 열정이 느껴졌다. 그 느낌에 혼자 놀래서 깜빡 눈을 떠보니, 사방에 파란 바다가 나를 자극한다.
여행 5일째 새벽 4시. 어느 정도 몸이 지쳐가는지 조금씩 게으른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브리즈번 공항까지 택시를 타면 얼마정도 드나요?"
"아마 한 30달러 정도 들 겁니다."
트랜짓 센터의 보안요원에게 택시요금을 물어보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택시를 타기로 내심 결정한 모양이다. 예정보다 30분 일찍 터미널에 도착한 탓도 있었겠고, 5시에 출발하는 에어 트레인을 타고서는 6시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여유롭게 타기엔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때문이기도 했을 것이지만, 제일 큰 이유는 조금씩 체력이 달리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괜히 마음 졸이는 것 보다 호주택시도 한번 경험삼아 타보자 결심하고선 도로로 내려갔다.

브리즈번 국내선 공항 버진블루 창구 - 새벽이라 역시 사람들은 별로 없다.

게이트에서 탑승대기중인 버진블루 항공기 - 빨간 동체가 무척 예쁘다.
오전 4시 40분에 도착한 브리즈번 국내선 공항. 역시나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시드니로 가는 항공편은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했었던 버진블루 항공인데 초저가 항공사로 유명하다. 일단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마그네틱라인이 있는 항공권을 주지 않고 달랑 영수증 하나만 끊어주고선 그것을 이용해 탑승한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기내 서비스는 유료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헤드폰에서부터 식사, 음료서비스까지 스튜어디스가 일일히 요금을 받는다. 내가 탔던 6시발 시드니행 항공기에는 대학생인듯 보이는 사람들이 꽤 탔었는데, 스튜어디스와 농담까지 주고받으면서 커피와 아침식사를 주문하면서 지갑을 꺼내고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모습이 무척 재미난다.

멀리 해안을 따라 골드코스트-서퍼스파라다이스가 보인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호주 동부해안.
창밖으로 골드코스트가 보인다. 창가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에 눈꺼풀이 꽤 무겁다. 눈을 떳다 감았다고 생각한 것 뿐인데, 어느새 시드니가 눈앞에 보인다. 두리번 두리번, 오손도손 모여있는 시드니 외곽의 빌라 지붕들이, 여유롭게 시드니 항만 주변을 배회하는 요트들이 예쁘다.
여기가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도시, 시드니구나. 드디어 내가 왔다, 시드니여.
늘 영화에서만, 사진에서만 보던 그렇게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이제 내 눈앞에서 바라보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발걸음은 '얼른 공항을 빠져나와서 시내로 들어가야 해, 1분 1초라도 지체할 시간은 없어.' 라고 내 이성을 자꾸만 각성시킨다.
그래 알았다. 내 최대한 힘을 내서 시드니의 모든 것을 보고 느끼도록 하지.

시드니 국내선 지하철역 - 저기 광고판에 보이는 자동차가 현대 투스카니이다.
그린패스와 에어패스를 끊고서는 종종걸음으로 시드니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역시 세계적인 관광지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캐비넷을 끌고, 지도를 들고 두리번 두리번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미소가 지어진다. 브리즈번과 허비베이에서는 익숙하지 못했던, 한가롭고 조용한 사람들 모습에 때때로 외로움도 느꼈고, 역시 여행자는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제 그런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며칠 다닌 여행이 벌써 익숙해졌는지, 이젠 낯설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더군다나 시내로 향하는 전철을 타자마자 귀에 들어오는 한국말이 나를 더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다. 한국에서 방금 도착한 유학생인 듯 보이는 여자분과 마중나온 현지 유학생인 듯한 남자분이 힐끔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서로 그동안의 안부를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다.
호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시드니에는 여러나라 사람들이 이민을 와서 정착하고 있다. 한국인과 중국인은 물론이고, 일본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호주의 다국적 문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민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특히나 시드니는 워킹홀리데이나 어학연수, 유학, 취업 등의 목적으로 방문한 한국인이 무척이나 많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로는 시드니에서 걸어다니는 동양인 세명중 하나는 한국인이라는데 이미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경험했으니 정말 틀린 말은 아닌가보다.

시드니 센트럴역 전경 - 저 열차가 시드니 전철인데 2층 전철이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게 붙어있는 공항 덕분에 그 한국인들과 이야기할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전철이 센트럴 역에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영차 메고서는 지하도를 걸어나왔다. 다소 쌀쌀한 바람 끝에 짭잘한 바다내음이 뭍어나는 듯하다. 이제 겨우 오전 8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선 벤치에 앉아 지도를 펼쳐 본다.
왼쪽부터 센트럴스테이션역, 센트럴에서 바라본 죠지스트리트, 시드니 전철의 내부모습
오늘부터는 세부 일정을 짜놓지 않았다. 도시에 머무를 동안 마음가는대로, 발 가는대로 돌아다녀보리라 생각하고 텅텅 비워놓았었기에 막상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일단 걷기로 하자. 걷다 보면 무언가 목표가 생기지 않겠는가 하며 죠지스트리트를 따라 성큼성큼 한발자욱씩 내딛는다.

시드니 마켓시티 입구
제일 처음 들른 곳은 센트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마켓시티였다.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시드니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데 물건을 진열하고 매대를 정리하는 모습, 그 사이를 열심히 돌아다니는 상인들과 여행객들의 모습이 정말 남대문 시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군데군데 한국인으로 보이는 상인들이 있고, 대부분 중국인인듯 하다. 상가를 두어 바퀴 둘러본 후 몇가지 선물들을 구입한 후 다시 죠지 스트리트로 나왔다. 카메라의 배터리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기에 얼른 플러그를 구입해서 숙소로 향해야 할 듯하다.

마켓시티 내부 모습 - 대부분의 매장이 이런 형태의 좌판이다.

역시 호주답다. 캥거루와 코알라 인형들. 하나 가격이 대충 5달러정도.
근처에 바로 전자제품 가게가 보인다. 혹시나 해서 들어갔더니 마침 내가 찾는 그 플러그가 있다. 무려 7달러라는 가격에 상당히 망설였지만, 더이상의 시간을 지체하느니 이정도 금액이야 감수한다 생각하고 지갑을 꺼냈다. 자, 이제 플러그도 해결되었으니 숙소를 구해보자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그렇게 유명하다던 Wake Up!이 내 눈앞에 보인다. 이거참, 느낌이 좋다. 하나하나 원하던 것들이 별 고생하지도 않고 순식간에 다 풀려버린다.
Wake Up!은 시드니 센트럴과 죠지스트리트 교차로에 위치한 백패커인데 그 시설이 다른 여느 숙소보다 월등하여 10인용 도미토리가 25달러라는 다소 비싼 숙박비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들에게 무척이나 인기가 높다. 체크인하기엔 다소 이른시각이 아닐까 하고 리셉션에 줄을 서본다.
"어서오세요."
"하룻밤 묵어가려 합니다. 10인용 도미토리에서요."
"아, 10인용은 지금 꽉 찼습니다. 대신 8인용이 비어있는데 26달러에요."
까짓꺼 1달러 정도야 하면서 카드키를 받아들고서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깔끔하고 아늑한 인테리어가 마음에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즐거운게 수많은 이름모를 여기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배낭 여행객들이라는 점이다. 다들 활기차 보이는 그 모습들로 인해 나의 에너지가 점점 더 차오름을 느낀다.

Wake Up! - 704호의 모습이다. 이정도만 되어도 정리상태가 양호한 축에 속한다. 한 열배정도 지저분한 방들도 있을 정도.

내 침대 - 널부러진 자켓과 양말, 수건 - 저 가방이 호주여행용 가방의 모든 것이다. 물론 돌아올때는 선물때문에 짐싸는게 무지 힘들었다.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콘센트에 충전기를 끼워놓고서는, 여정을 확인해본다. 일단 서큘러키로 가서 페리를 타보자. 어디로 가든 제일 빠른 것을 골라서 시드니의 전경을 바다위에서 감상하자고 결정하고서는 다시 가방을 둘러매었다. 나, 단단히 흥분한 모양이다.

마헤노 난파선
1935년에 좌초된 마헤노 난파선(Maheno Shipwreck)은 당시 좌초된 상태 그대로 방치해 놓아 지금은 흉물스러운 뼈대만 남은 고철덩어리가 되었지만, 호주정부는 이 난파선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어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책인데,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서로 무장된 호주인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간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곳에서 난파선의 사진을 보았었지만 막상 내눈앞에 보이는 녹슨 선체를 보고 있자니 그 세월을 피부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맥켄지 호수로 떠나기전 유롱비치에서 . 페트릭, 눈감았군.
이 마헤노 난파선과 더불어 프레이저섬의 백미인 장소가 바로 맥켄지 호수이다. 투어의 마지막 코스였던 이 맥켄지 호수는 해발 100미터정도되는 모래 언덕에서 수천년동안 내린 빗물로 형성된 150헥타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프레이저섬에서 유일하게 이 맥켄지 호수의 물과 모래가 상처와 질병의 치유능력이 있다고 한다.

맥켄지 호수.
패트릭과 파스칼은 호수로 내려오자마자 비치타월을 꺼내든다. 녀석들은 오늘도 여전히 광합성이고, 의외로 노니가 버스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인지 아까부터 안색이 별로 좋지 못한 듯 보인다. 난 바지를 걷어올리고, 카메라를 목에 두른 채 첨벙 호숫가로 발을 담그고서는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퐁당퐁당 물을 튀겨가며 셔터질을 한다. 몇몇의 여행자들은 물속에서 자맥질을 하느라 바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합성에 열중이다.

이것이 바로 평화. - 맥켄지 호수
구름이 머리 뒤로 남실남실 흘러간다. 어디선가 바람이 나의 뺨을 훑고 지나간다. 이내 너울너울 바람에 수면의 반짝이기 시작하고 아름답게 투영된 호주의 하늘 모습이 따사로운 햇빛에 반사되어 나의 눈을 간질거린다. 이런 모습을 두고, 아마 사람들은 평화롭다는 말을 할 것 같다.
여행의 종류는 무척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와 풍경을 보면서 지식을 넓히는 목적도 있을테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혀를 즐겁게 하는 식도락 여행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찌든 도시생활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무작정 배낭을 둘러매고 오직 자유와 평화를 느끼기 위해 떠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라면, 이곳 맥켄지 호수는 나에게 이번 여행의 진정한 참맛을 느끼게 해주기에 너무나 안성마춤인 곳이었다.
프레이저섬에서의 모든 투어일정을 마친 우리는, 이제 섬을 떠나기 위해 선착장으로 향한다. 서쪽 끝에 있는 프레이저섬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지선을 기다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의 여행을 끝마치게 되면 정신적인 만족을 느끼는 반면 육체적인 피로를 느끼게 마련인데, 뉘엿뉘엿 지는 호주의 태양빛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앉아있는 우리의 모습은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나큰 것을 하나씩 다들 얻은 마냥, 흐뭇한 미소를 하나 가득 머금은 채 느긋하게 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에 답레라도 하는 것 마냥, 프레이저섬의 석양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프레이저섬 선착장에서 바라본 석양.
이제 이 배를 타고 나면, 모두들 각자의 길로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패트릭 녀석들은 북쪽 에얼리비치로, 그리고 나는 그토록 기대하고 있는 꿈의 도시 시드니로.
소소하고 작은 이별이겠지만, 나름대로 함께 어울리며 쌓은 우정이 있었던지라, 그리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쉬운 표정은 얼굴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까지 아무말 없이 우리 일행중의 누군가였던 사람들에게도 공통적인 것이었을테다. 갓 스무명이 넘지않았던 우리 일행들은 허비베이 선착장에 도착함과 동시에 제각기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타면서 가벼운 목례를, 힘찬 손짓을 서로서로 나누기에 바빴다. 페트릭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하고선 허비베이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도중에 일행속에 조용히 묻혀있던 한 사람을 발견한다. 혼자 여행온 여자였던지라 쉽게 말을 건네지 못하였었는데, 목적지가 같았기에 자연스레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 허비베이로 돌아오는 길, 배 위에서 찍은 보름달
"이름이 뭐에요?"
"제 이름은 '아카리'에요. 그쪽은요?"
"제 이름은 좀 어려워요. 부르기가.."
"이름이 '어려워'에요? 흣. 안녕, 미스터 어려워!"
"켁, 그게 아니고..."
이 친구, 말하는게 제법 귀엽다.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유럽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도 독일에서 어학연수를 위해 호주로 왔다가 돌아가기전 호주를 여행중이었다고 한다.
자기 몸집만큼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혼자서 돌아다니는 모습에 도와줄까 하고 가방을 들어주었더니 자연스럽게 내게 인사를 한다. 이미 투어 중에 안면은 있어 그다지 어색하진 않았기에 버스 출발 시간까지 같이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주고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이 일본어같은 느낌이 좀 드는데, 혹시 일본어 아세요?"
"당연하죠. 엄마가 일본인이거든요."
"아, 소오데스까?"
"오, 일본어 할 줄 아세요?"
"아뇨. 이 정도밖에 못해요. 아리가또, 스고이, 가와이. 뭐 이런 정도..."
둘 다 저녁을 먹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주변에 식사를 할만한 곳이 있을까 하고 둘러보다가 대뜸 중국 음식점에서 밥을 먹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오, 호주에서 먹는 중국음식이라. 호기심이 생긴다.
"어머니가 일본인이면, 일본에 가본적은 있겠죠?"
"네, 일본, 타이, 홍콩을 다녀왔죠."
"한국은 올 생각 없어요?"
"내년에 아시아를 더 보고 싶어요. 한국이랑 중국."
"그렇군요. 제가 초대는 못하겠지만 혹시 한국 오게 되면 메일을 보내주세요. 볼만한데를 알려드릴께요. 아, 그리고 전 아마 내후년 쯤에 독일에 갈지도 몰라요. 월드컵 보러."
"아, 그래요? 어디서 하는지 아세요? 전 쾰른에 사는데."
"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에이,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오려구 그래요. 독일 공부 좀 더하셔야겠네."
외모는 서양인인데, 먹는 음식이나 말투가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생각하는 것과 말투에서 꼼꼼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상당히 스마트해 보이는 재치가 돋보이는 괜찮은 사람이다. 역시 동양인의 교감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처음 독대하는 서양 아가씨인데도 별로 부담스럽지가 않다. 볶음밥과 탕수육, 라조기를 배불리 먹고 정류장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니 어느새 헤어질 시간이다.
"이제 전 가야겠네요. 좀 더 일찍 인사했더라면 많은 이야기 나눌 수 있었을텐데, 조금 아쉬워요."
"케언즈까지 가려면 많이 힘들겠어요. 푹 자고 일어나면 도착할테니 버스타면 바로 주무세요. 저도 아쉽네요. 독일가면 꼭 연락할께요."
"그래요. 꼭 공부 더 하시고요! 한국 가면 메일 주세요."
"하하, 네. 짐은 제가 들어줄께요."
"고마우셔라."
"그럼 잘 가구요. 아우프 비더젠. 사요나라."
"크, 님도 좋은 여행하세요."
페트릭 일행도 이 버스를 타는가보다.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버스로 향하면서 나에게 손을 흔든다.
"시드니 잘 가고, 꼭 메일 보내요!"
"그래요 페트릭, 에얼리비치까지 가느라 고생할텐데 푹 자요. 파스칼, 노니, 이런말 하긴 좀 징그럽지만 아마 그리울거에요. 정말 즐거웠어요."
"잘가요. 우리도 보고싶을 거에요. 사진 꼭 보내주세요."
"굿 바이~!"
버스에 타고 나서도 복도로 고개를 쭈욱 빼더니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힘차게 그들에게 엄지를 펼쳐보이며 답례를 하니 헤벌죽 웃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첫번째 여정에서 정말 좋은 녀석들을 만난 것 같다. 잘 지내길.

허비베이 버스터미널 옆 길거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벌떼마냥 버스에 타고나니 이내 허비베이 정류장은 정적속에 차분해진다. 간혹 소음을 내면서 나타났다 사라져가는 꼬마녀석들의 스케이트보드 소리와 대뜸 내게 시간을 물어보곤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몇 외에는, 까만 밤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는 별들만이 이젠 내 동반자이다. 만났던 사람들 하나하나 모두 친절했고, 다들 이 무궁무진한 호주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열심히 떠나가고 있다.
인생에서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날이 언제 과연 있을까 생각하면서, 잠시 스쳐가야 하는 인연이었겠지만 그만큼 친해져 버렸기에 기억에 오래 남을, 이 소중한 사람들이 이제 하나 둘 제각기 꿈과 미래를 찾아 떠나들 간다. 나를 알게된 사람들 모두에게 행운과 축복 있기를. 나 역시 그대들을 이 소중한 기억 속에 고이 간직하리오.
30여 분쯤 기다렸을까, 이미 내가 탈 차는 벌써부터 정류장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꽤 허름해 보이는 이 맥커피 고속버스를 타고 브리즈번으로 가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차 문이 열리고 좌석을 배정받아 자리를 잡은 난 이내 잠을 청해야만 했다. 브리즈번까지 7시간. 최대한 빨리 자는게 속이 편하지 않겠는가.
오전 일정은 프레이저섬 동부 해안길을 따라 100마일을 올라가면서 칼라샌드, 난파선 등을 보는 코스이다. 평평한 모래사장이 넓고 길게 놓여있는 프레이저섬의 동부 해변은 자가용이나 버스는 물론이고 경비행기까지 이착륙을 할 수 있을만큼 단단하다. 넘실대는 파도도 골드코스트의 그것에 못지 않게 힘찬데, 날이 꽤 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낚시 하는 사람 몇 이외엔 이상하리만치 수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텔레파시가 통했을까. 열심히 운전을 하시던 캡틴 캥거루가 마이크를 켠다.

백사장을 질주하는 버스~!
"에, 우린 지금 프레이저섬의 동부 해안을 따라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것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말을 하긴 했는데, 역시 못알아들었다. 대충 나름대로의 변역을 해보면, 몇군데 괜찮은 풍경이 있는 곳으로 갈 예정이고, 그때마다 경비행기를 탈 수 있게 해줄 것이며, 경비행기를 타고 프레이저섬을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거라는 내용인 듯 했다.

경비행기를 타기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여기 해변에는 고래와 상어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수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운이 좋다면 고래를 볼 수도 있지요. 여러분들은 따로 고래투어를 참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 저기 보이나요? 고래입니다."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버스는 이내 정차한 후 숨죽여 넘실대는 파도 사이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어디에 고래가 있단 말이지. 저긴가.
"저기다!"
누군가 짧게 소리치자 마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난 해변과 반대편 좌석에 앉아 있어서 확인하기가 어려운 상태라 눈썹을 더 쫑긋 세우고 탐색하기 시작한다. 대체 어디에 있는거지. 저긴가.
"저기에 또 있다!"
길게 숨구멍으로 바닷물을 뿜어대는 고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이내 물 속으로 사라진다. 진짜 고래를 봤다. 그것도 공짜로.
가운데 점 두개가 고래
매년 이맘때쯤 되면 남극대륙 부근에 살고 있던 고래 무리들은 좀 더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호주를 들른다고 한다. 이른바 중간 정착지쯤 되는 곳인데 호주 동부 해안을 따라서 웬만한 곳에서는 이 고래들을 구경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무리들이 워낙에 많고 규칙적이어서 시드니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고래들의 이동모습을 관찰하는 '고래투어'를 상품으로 만들어 놓기까지 해놓았다. 고래나 돌고래들은 호기심이 무척 강해서, 배가 다니면 항상 주변으로 모여드는데, 우리나라와 차이가 있다면 호주에서는 관찰하고 지켜보는 것을 즐기는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잡아서 수산 시장에 파는 것을 즐긴다는 정도일까. 자그마한 밍크고래 한마리에 1억이나 한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자연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고 그것을 지켜내려고 하는 이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을 따라오려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많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버스가 한시간 남짓 달렸을까. '칼라샌드'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칼라샌드는 8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진 모래바위인데 크게 절경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이 무수히 쌓인 퇴적층의 겹겹을 바라보고 있자니 대륙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 같아 조금은 상기된다. 하지만 솔직히 절경은 아니다.
칼라샌드(Coloured Sand)
"비행기 타고싶은 사람, 얼른 저기 가서 타세요!"
갑자기 캡틴 캥거루가 우리를 향해 외친다. 여기까지 오면서 경비행기를 탈 기회가 이미 두번이 있었지만, 사실 계획에 없던 것에다 과연 60달러의 가치를 할까 싶기도 한 상태여서 갈등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미 타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엑설런트'를 외치고 있었지만, 60달러가 저렴하다고 생각되진 않았기에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타고 싶은 사람, 얼른 타라지 않는가. 혹시 우리 캡틴 캥거루 아저씨가, 또는 필받은 경비행기 조종사가 5분정도 일종의 서비스를 우리에게 해주려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 페트릭 일당들, 냅다 달려가서 줄을 선다. 저녀석들, 아까 비싸다고 타기 싫다고 분명 말해놓고선 저기 달려가는걸 보니, 정말 공짜가 맞나보다 생각에 어느새 난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다. 이야, 난생 처음 경비행기를 탄다. 

경비행기다!
부릉부릉, 흡사 강력 튜닝카의 엔진소리 마냥 푸들푸들 돌아가는 프로펠러의 도움을 받아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한다. 순간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 후에 창밖을 보니 어느 새 지나왔던 해변의 풍경이 대각선으로 보인다. 좌로 선회, 우로 선회, 급하강과 급상승을 거듭하는 경비행기 속에서 우린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무조건 셔터를 눌러 제낀다. 
아, 이 짜릿한 느낌
마치 싱싱한 브로콜리 밭을 보는 듯한 프레이저 숲의 전경들과, 그 사이로 샛노란 드레싱을 해놓은 듯한 너른 모래 언덕들, 그리고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찰랑'하고 튕겨져 나올 것만 같은 깨끗한 호수들이 눈앞에 환상적으로 펼쳐진다. 에버랜드의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짜릿한 전율과 함께 이런 광경을 내가 또 언제 다시 볼까 하는 달콤한 감동이 밀려온다. 날씨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 것도 내겐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대형 점보기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었던 이 날렵한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더 내것으로 흡수하기 위해 의자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키고서는 이곳 저곳 무작위로 창문너머 셔터질을 해댄다.

브로콜리같아..
어느 새 비행기는 바다 한가운데로 우리를 내몰고는 회전비행을 한다. 내쪽 창문과 바다가 평행이 되어버렸다. 잠시 떨어질 것만 같은 공포심이 들었지만, 바다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들을 발견하고 눈을 내리 부릅뜨고는 바라보기 시작한다.
"돌고래다!"

돌고래 떼
한 무리의 돌고래들이 이리 저리 뭉쳐다니며 헤엄을 치고 있다. 아, 내가 왜 망원렌즈를 가져오지 않았던가 후회를 함과 동시에 갑자기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빨라졌다. 찰칵 찰칵, 계속되는 선회 비행 속에서 한 마리라도 더 내 앵글에 집어넣기 위하여 몸을 비틀고는 그녀석들을 찍기 시작했다. 내 가슴팍에 무언가 동그랗고 시커먼 물체가 턱 하니 압박을 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 검은 괴물체가 필사적으로 고래들을 보기 위해 내 쪽으로 몸을 당긴 옆자리의 노니였다는걸 알아챈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잘타셨죠? 재미있었나요?"
"환상적이었어요!!!!"
방금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소풍 나온 유치원생 마냥 이구동성으로 외쳐대었다.
"자 이제 수금합니다. 일인당 60달러씩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라, 공짜가 아니다. 내가 잘못 알아들었던건가, 멋적게 지갑을 꺼내 들고서는 조심스레 조종사를 바라본다. 노니나 패트릭, 다른 사람들의 태도도 나와 얼추 비슷하다. 조종사의 능글맞은 상술에 조금 당황스러운 듯 지갑에서 지폐를 끄집어 내고는 쭈뼛쭈뼛 건네는 모습들이 다들 공짜 탑승인 줄 알고 있었나보다. 뭐 아무렴 어떠냐. 어차피 줄 돈이라면, 내가 언제 한국서 이런 멋진 경험을 할까 만족하며 기분 좋게 60달러를 꺼내어 기꺼이 준다. 식비를 조금 줄이던가, 현금서비스를 받던가 하지 하며 탑승료를 지불하고선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프레이저섬의 명물인 난파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탑승기념으로, 패트릭과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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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찍 잠이 들어서였을까, 눈뜬 시간이 오전 6시이다. 그렇지, 어제 캡틴 캥거루 말씀이 6시 반쯤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것을 권장한다고 했지. 호주에서 떠오르는 일출은 어떤 느낌일까 하는 설레임에 아직 잠에 절어있는 내 육체를 이끌고 카메라와 삼각대를 주섬 챙긴 후 방을 나선다.
딩고는 흡사 우리나라의 변견과 같이 생긴 프레이저섬의 야생동물이다. 오래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놓고간 개가 야생화되어 정착한 동물인데 누런 털에 야윈 모습이 한국의 시골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개와 너무나 흡사하다. 성격이 매우 난폭하여 먹이를 주려거나 위협을 가하면 사람을 해할 수도 있다고 하며, 어디다 팔아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야영장의 신발이나 카메라 등을 물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여기서 몇번 나섰던 투어 중에서도 딩고를 만나긴 했었다. 열심히 땅을 파는 딩고, 해변을 걸어가는 딩고 등등, 사람에게 위협적이라는 가이드의 말과는 달리 요녀석, 상당히 귀여워 보인다. 해변가엔 몇몇의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새로운 태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의 시선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삼각대를 펼쳐놓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데, 역시나 수평선 근처로 뿌옇게 드리워져 있는 구름들. 멋진 장면은 찍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혹시 사진작가세요?" 삼각대를 갖고 와서 그런지, 어김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멋지군요." 나에게 말을 건넨 그 아저씨(?)는 레바논 사람인데, 영국에서 살다가 이번에 가족과 함께 호주를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투어 일행중 유일한 가족 참가자였는데, 두살쯤 되어보이는 아기가 무척이나 예뻤다.
좀 멋적긴 해도, 기분이 마냥 좋다. 아니 그것보다도, 이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참 정감이 간다. 혹자가 말하길, 호주에 레바논 사람들이 꽤 산다고 하던데 이 사람들의 성격이 워낙에 다혈질이라 각종 사건사고의 중심에 많이 거론된다고 한다. 내 짧은 지식에 바탕을 해보아도, 레바논 하면 아랍계 무장단체밖에 생각나는게 없으니 괜한 선입견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 본다. 사실 레바논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육상선수같은 탄탄한 몸매에 까무잡잡한 피부임에도 불구하고 말투나 행동이 점잖아 보인다. "투어가 끝나면 어디로 갈 예정이세요?" 제법 느끼한 작별 인사다. 그는 나와 가볍게 악수를 한 후 이내 가족들이 서있는 곳으로 뛰어갔고, 난 몇장의 사진을 전리품마냥 메모리에 저장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하루종일 투어가 진행되니 든든하게 아침을 먹도록 하자. "파스칼, 노니. 좋은 아침! 근데 아직 잠이 덜 깬것 같네요?" 내가 피곤하다며 일찍 숙소로 들어간 후에도 이 친구들은 기어이 펍에서 끝장을 본 모양이다. 셋 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선 비몽사몽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곤 바로 꾸벅꾸벅 존다. 녀석들,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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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롱비치 리조트에서의 점심 식사는 뷔페식이었다. 햄, 파스타, 채소, 생선튀김 등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서양 음식들이었는데 역시 고단백 고지방 음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것 저것 맛있어 보이는 것들만 집기보단 골고루 접시에 담고서는 이 사람들의 식습관을 한번 느껴보기로 한다. 그럭저럭 한국인 입맛에도 맞는 듯 한것이 먹는 걱정은 크게 없을 듯 하다.
물놀이 중인 노니와 패트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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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이스케입 백팩커즈. 오른쪽에 보이는 것들이 캐러반을 개조한 숙소.
호주의 날씨는 한국과는 무척 다르다. 남반구이므로 지금은 겨울이지만 워낙에 땅덩어리가 커서 늘 열대지방인 케언즈같은 지역도 있고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많이 부는 멜번같은 도시도 있다. 허비베이는 위도상으로 북반구의 대만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비교적 온화한 날씨를 보여주고 있지만 해가 떨어졌을때나 해가 있어도 그늘에 들어가게 되면 쌀쌀하다. 더군다나 이쪽 호주는 건물 냉난방에 대해서 우리 나라처럼 철저하지 않다. 한겨울에 방안에서 반팔을 입을 수 있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으리라.
간밤에 한기를 느껴 옷을 주섬 껴입고 잤던 기억이 난다. 눈을 떴을 때가 일곱시, 한국시간으로 치면 오전 6시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명종을 챙겨오긴 했지만, 이런 추세라면 그다지 필요는 없을 듯하다. 역시 마인드 콘트롤이 중요한 것일까. 오늘은 오전부터 프레이저섬 투어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관계로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샤워를 하고선 짐을 챙겼다.
파랗고 청명한 저 하늘, 스모그에 찌들려 찌부둥한 하늘만 보던 경험뿐이던 내가 서울에서 이런 맑은 하늘을 본적이 1년에 몇번이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맑은 공기와 지저귀는 새소리들이 나의 코와 귀를 즐겁게 해준다. 가슴을 펴고 한껏 숨을 들이쉰 후 가방을 메어들었다.

한적하고 깨끗한 호주 소도시 허비베이의 전경. 저 도로 한가운데 드러눕고싶은 기분이 들었다면 좀 오버인가 -_-
"오늘 전 프레이저섬에 들어가요. 만나서 반가웠고, 좋은 여행하세요."
"잘 다녀와요. 거기 정말 환상적인 섬이에요."
"이건 한국 동전이에요. 기념으로 선물을 하는 겁니다."

왼쪽이 미키, 오른쪽이 제인.
백원짜리 세개씩을 받아든 미키와 제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연신 동전을 바라보며 즐거워 했다. 겨우 15센트 정도 밖에 안되는 가치이지만 그녀들이 언제 이 한국 동전을 만질 수 있을까. 아주 작은 일이었지만 한국을 알리는데 일조를 했다는 미미한 자부심이 느껴지긴 했다.
무수히 많은 짜증나는 일들, 얼토당토 않은 정치, 답답함으로 똘똘 뭉친 사회, 허겁지겁 앞도 안보고 달려가기만 하는 우리네 인생. 내가 한국인이라는게 부끄러운 적도 참 많았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도 있었지만, 막상 떠나보고 나니 그런것들 한동안 잊을 수 있어 좋고 아무튼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다지 한국인임이 부끄럽진 않는 것 같다. 하긴, 사회의 일원이었던 위치에서 한켠 멀리 떨어져 관망하는 지금 순간에 그런 너저분한 스트레스는 일절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여기 호주의 공기를 마시고, 낯선 사람들과 재미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시간들이 모자를지도 모를터이니.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버스가 숙소로 도착했다. 영화에서만 보던 하얀 2층버스가 내 눈앞에 정차한 후, 카우보이 모자에 반바지 차림의 멋진 콧수염을 기른 기사아저씨가 내린다.
"프레이저섬 투어 예약하신 분들 모두 오세요~!"
호주의 대부분의 투어는 운전기사가 가이드를 겸한다. 우리 투어 인솔에는 캡틴 캥거루라는 분이 해주셨는데, 프레이저 익스플로러 투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실력있는 분이라고 한다. 내가 보았을 때도 그 콧수염에서 묻어나는 카리스마와 연륜이 다른 분들보다는 대단해 보인다. 약간은 오버하는 듯한 행동과 말투도 그다지 어설퍼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그런 행동들이 우리를 재미있게 유도하기도 한다. 반 정도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몇군데 숙소에서 픽업을 더 거친 후 버스는 이내 프레이저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선착장으로 우리를 데려온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또는 직접 4륜 지프를 이끌고 캠핑을 즐기기 위해 선착장에 대기중이다. 혹시 이곳에 한국인이 있지 않을까 잠시 둘러보았지만, 일본인인듯 한 사람 몇몇 외엔 다 서양인이다.
프레이저섬 투어는 대부분 2박 3일 4륜 지프 캠핑을 추천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이만도 122km인 세계 최고의 이 모래섬을 각지의 친구들과 직접 차를 몰면서 구경하며 텐트를 치고 캠핑하는 그 재미가 1박2일 가이드 투어보다는 백배 재미있을 것이란 것은 자명한 일일테니 말이다. 비록 여정이 녹녹치 못해서 1박2일 투어로 만족해야 했지만, 혹시라도 넉넉하게 여행을 한다면 무조건 2박 3일 4륜 지프 캠핑이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다.

2층버스다!!

먹을게 없을까 하고 들어간 호주의 대형마트중 하나인 울워쓰(Woolworth)
뭘 사야할지 몰라서 달랑 생수 한통 사서 나왔다.
호주의 건널목은 재미난다. 우리나라처럼 시간되면 신호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아닌, 손바닥만한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신호가 바뀐다. 게다가 버튼을 누르면 띡, 띡 하며 소리가 나더니 녹색불이 켜지고서는 싸구려 장난감 전자총마냥 '두두두두두두' 하고 소리가 난다. 그 신호 주기도 일정치가 않고, 대략 주변의 교통신호가 행인들이 건너기 적절해질 무렵이면 바뀌는 듯하다. 그나마 평소엔 차들이 많지 않으니 현지인들은 대놓고 무단횡단 하기 일쑤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처럼 차들이 빵빵거리지 않고 슬그머니 정차해준다. 너무도 태연히, 너무도 당연한 듯이 무단횡단을 하는 그네들 사이에서 혼자 덩그러니 신호를 기다리는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조금은 뻘주름하기까지 하다.

서퍼스파라다이스 부근 도로. 저 가로등 기둥에 버튼이 달려있다.
자, 무엇을 먹을까 하고 푸드코트를 둘러보길 15분. 도무지 먹을만한게 떠오르질 않는다. 호주는 특별히 전통음식이 없는데다, 다민족 국가인 관계로 우리나라 포드코트에서 파는 그것들과 별 차이가 없다. 햄,에그,브레드로 구성된 식사 세트는 가격에 비해 양이 차지 않을 듯 하여, 결국 발걸음을 옮긴 곳은 '헝그리잭'. 우리나라에서 버커킹이 이곳에선 헝그리잭이다. 배고픈 잭. 하핫. 거 참 이름 재미난다. 와퍼세트를 하나 시켜들고 야외 식탁에 앉아 한입 베어문다. 프렌차이즈 체인점이 그러하듯, 맛은 어느나라나 거의 비슷한 것 같다. 감자 칩의 굵기가 두배는 더 굵었는데, 생각보다 짜고 기름기가 많아서 쉽게 먹지는 못하겠다. 이런 감자칩에 생선튀김 하나 얹어서 먹는게 호주인들의 주식인 Fish&Chips 라고 하니 그렇게 비만인들이 많은 듯 하다. 특히나 이곳 여성들은 심각하다.
대부분 이목구비는 서양인 특성대로 뚜렷하여 둘중 하나는 예쁘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허나 몸매를 보자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양인의 체구가 하체가 좀 튼실한 면이 없지 않지만, 이것은 조금 심각할 정도이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어깨너비만 하고, 뱃살이 좀 접히는 정도의 체형은 평균 수준이다. 우리가 영화에서만 보던 초고도 비만 체구들이 여기엔 너무도 흔하다. 살보다 지방이 몸의 두배는 될만한 덩치들이 주변에 깔려있다고 해야 표현이 적당해 보일 듯 하다. 이렇게 보니 정말 우리나라 여성들의 몸매는 퍼펙트라고 봐도 될 만하다. 하긴, 이런 기름덩어리를 주식으로 먹으니 저렇게 안찌는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겠지.
지금시간 1시, 4시에 허비베이행 버스를 타야하니 이제쯤 출발을 하는게 나을 듯 해 길을 나선다. 건널목을 향해 가던 중 실크블라우스에 초미니 스커트,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는 금발의 여성이 보인다. 아하. 이곳도 이렇게 이쁜 사람들이 있긴 하구나 바라보던 중, 들려오는 한국어. 그렇다. 그녀는 한국인이었다. 옆에 어머니로 보이는 듯한 여자분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래도 처음 외지에서 보는 한국인이어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무언가를 찾아가는 듯 했고, 괜한 오해를 살듯 싶은데다 내 차림이 무척이나 배낭여행자스러워서, 차림새가 너무도 고급스러운 저사람들과는 잘 안맞을 듯해서 였을까.
"방을 하나 예약하려고 합니다."
"When you ................?"
"네? 저 영어 잘 못하니까 쉬운말로 해주세요."
"Do you ............................"
"음. 뭐라고 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오늘밤 9시반에 허비베이 터미널에 도착합니다."
"Okay~ ..........."
브리즈번 트랜짓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오늘 묵을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었다. 와, 도무지 전화로 이사람들 말하는것을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허비베이는 브리즈번에서 300킬로정도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그렇다보니 억양이나 발음이 완전 딴나라 언어같았다. 더군다가 전화로 이야기 해야 하는 상황이니 눈치를 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난감하기만 하다. 우여곡절 끝에 대충 몇단어 알아듣고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도착해서 픽업을 안오면 어떡하나, 혹시 내가 예약을 잘못한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선 느긋이 버스시간을 기다린다.
브리즈번 버스터미널 대합실
허비베이까지의 버스시간은 5시간 40분 정도. 서울-부산정도를 오가는 시간이지만 이사람들에게는 동네 나들이 정도의 수준이다. 버스로 북쪽 케언즈에서 남쪽 멜번까지 다니는 노선이 있는데, 그 시간이 무려 60시간이라고 한다. 말이 60시간이지 꼬박 이틀 반을 안쉬고 내리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그 거리를 용캐도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도 한단다. 진정 그들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맥커퍼티 버스. 허비베이로 가는 도중 휴게소에서 찰칵.
남반구이다 보니 내가 탄 버스가 브리즈번을 벗어나자마자 이내 해가 저문다. 긴 여행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이라도 좀 청해볼까 하고 누웠는데, 생각보다 좌석이 불편하다. 푹신한 느낌은 우리나라 버스보다 훨씬 좋았지만, 웬지 좌석의 기울기나 크기가 한국인의 체형과는 맞지 않는 듯 하다. 옆자리가 비어있어서 결국 모로 비스듬히 누워서 겉옷을 베개삼아 누워서 눈을 감았다. 두시간쯤 지났을까. 버스가 휴게소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고, 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이야기 한다. 역시 알아듣지는 못했고,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봐서 같이 따라 내린다. 저녁식사를 하고 오라는 것일까. 대충 닭튀김 몇개를 먹고서는 버스앞에서 담배를 한대 물고 기다린다.
휴게소 이름이 "마틸다의 트럭 & 여행자 휴게소" 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버스들은 보통 휴게소에서 최소 40분, 최대 1시간씩 머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처럼 15분 정차해서 간단히 화장실을 다녀오고선 출발하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식사시간이 겹쳐있는 버스를 탈 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리 밥을 먹는다던가 도착해서 먹을텐데, 얘네들은 그게 아니다. 무슨 일을 하던 식사시간이 되면 챙겨먹어야 하고, 그게 버스를 타고 여행하는 중에도 예외는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지인들이 이야기하길, 식사시간에 1시간을 주는것들도 이사람들에겐 넉넉하지 않다고 한다. 하긴, 이사람들의 식사습관은 우리나라처럼 게눈감추듯 먹고 일어나는 그런것과는 많이 다르니 이해가 될만도 하다.
"당신이 브리즈번에서 온 미스터 임이쇼?"
"네."
"여기 타쇼."
허비베이에 도착했을 때 날 데려갈 봉고차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터미널 바로 뒤 주차장에 자기네 백팩커 팻말을 걸어놓고 수많은 봉고차들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예약했던 프레이저이스케입 백팩커의 봉고차도 한쪽 끝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역시나 이곳 사람들 말은 직접 들어도 도무지 한단어도 이해하기 힘들다. 발음이 구린건지, 아니면 내 귀가 먹통인건지..
프레이저이스케입 백팩커는 캐러반을 개조한 숙소로 유명하다. 게다가 가격도 1박에 11$정도로 무척 싸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꽤 찾는 곳이라고 한다. 내가 묵은 캐러밴은 6인실의 15호실이었는데, 거기엔 이미 5명의 사람들이 잘 준비를 마치는 중이었다. 하긴, 내가 백팩에 도착한 시간이 거의 10시였으니.. 아, 근데 내침대가 너무 형편없다. 2층 한자리가 남아있는데, 개조된 캐러반에 억지로 침대를 집어넣다보니 매트리스 바로 1미터 위에 천장이다. 이미 방 식구들과 인사를 다 끝낸 상황에서 또 가방을 들고 방을 옮겨달라고 말하기도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쓰기로 하고선 가방을 풀었다.
내방에는 스위스에서 영어공부를 하러 왔다가 돌아가기전 여행다닌다고 하는 한 남자와, 영국에서 온 여자 둘 등이 사용중이었다. 대부분의 백팩은 남녀가 방을 같이 쓰는 것이라고 익히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부담스럽기는 피차 일반일텐데, 이 녀석들은 제 방 쓰듯 옷을 훌렁훌렁 갈아입는다. 난 일부러 괜히 딴청 피우는 듯 내 가방 풀기에 여념없었는데 한 여자애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나에게 질문공세를 던진다. 다행히 영국아이다. 들린다.
"왜이렇게 늦었어요?"
"오늘이 제가 호주에 온 첫날이에요. 브리즈번에서 골드코스트 다녀오느라고 좀 늦었어요."
"오. 정말 엄청난 날이었군요."
Big Day.
그랬다. 오늘은 나에겐 정말 빅데이였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낯설었고 새로웠기에 그만큼 대단한 날이었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열흘을 더 보내어야 하지만 점차 적응이 되어가겠지. 그리고 떠날 때쯤엔 이곳이 무척이나 그립겠지. 내 인생에서 첫번째로 가져보는, 아무도 날 알지 못하고, 나역시도 아무것도 모르는 이 낯선 곳에서의 첫날. 내 인생에선 정말 대단했을지도 모를 오늘, 이렇게 호주에서의 나의 첫날밤은 흘러가는구나.

























